타이틀


icon합기도의 역사


기도는 어느때 누가 창시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일본에 망명한 신라인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 무리를 이끈 대표가 의광이며 일본 황실에서는 신라인 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이라고 불리워졌다. 일본 와세다대학의 도미끼 교수설에 의하면 "가마꾸라시대에 합기도가 신라 삼랑원의광을 그 시조로 하여 막부(幕府)의 미나도모가(源家)에 전하고 이어서 다께다가(武田家)에 남아 7대를 지나 다께다소오가꾸에 전하고,이어서 우에시바는 그의 고제(高弟)이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 의광이 가전의 무술을 토대로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여 그의 아들 의청에게 승계하고 의청은 갑비의 무전촌에 정착하여 그의 성을 지명에 연류하여 무전이라고 하였으며,무전가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합기도는 무전가의 비전무예로서 일본 황실귀족만이 배울 수 있는 호신의 무술로 전수되어 왔고 명치시절에 와서 무전가의 말손(末孫) 다께다소오가꾸 선생이 합기술을 일반대중에게 공개하였다. 한국에 합기도가 소개된 것은 어린시절 일본인의 양자로 일본으로 건너간 최용술(崔龍述)선생이 어린시절부터 다께다소오가꾸선생의 수제자로 합기도를 수련 연마후 해방후인 1946년 1월. 고국에 돌아와 대구에서 합기도 총본부를 두고 도주직에 올랐으며 이후 전국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오늘날 합기도가 일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일본합기도가 우리의 전통무예(傳統武藝)에 그 맥락을 두고 있다는 이론이 최근에 강력하게 대두(擡頭)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의 한국정통합기도(韓國正統合氣道)가 진정한 의미로 정통이 되기위해서는  일본에서 보다는 우리 전통무도에서 전통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여타문화가 그러하듯이,우리의 전통무도의 정신이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과 왜곡술책으로 단절되어 그 정통성이 무엇인가 하는 연구는 참으로 힘들다. 하지만 먼 우리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기필코 성취하지 않으면 안될 우리 합기도인의 궁극적인 과제라 하겠다. 후일 역사학자나 후학의 연구에 기대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icon합기도의 예법


도법의 7도


인(仁): 올바르게 무술(武術)을 익히며 깨달은 자는 매사를 가볍게 행하지 아니하며 어질고 존경을 받도록 행해야한다. 의(義): 무인은 의리(義理)와 의협심(義俠心)이 강하며 올바른 일에는 정의롭고 배신적인 언행(言行)을 하여서는 아니된다. 예(禮): 항상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된다.무인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 범절로써 특히 배운자로서 꼭 지켜야한다. 지(知): 힘은 머리를 능가하지 못하며 올바른 정신(精神)에 정확한 판단력으로 무를 연마(硏磨)하여야 한다. 신(信): 인간의 대함에 가장 중요한 것이 상대를 믿을 수 있게해야한다. 엄(嚴): 엄숙(嚴肅)하면서도 무게가 잡힌 분위기와 묵언적인 침묵이 흐를 수 있는 태도를 보여야한다 용(勇): 정의구현을 근본으로 불의를 배척(排斥)하는 태도와 정의의 편에서는 용기와 기백(氣魄)이 필요하다.

정통 합기도의 근본 정신


1. 故 최용술 도주님께서 강조하신 "일수절명" 의 정신과 술기로 합기도를 수련한다.
3. 모든 무술은 정신에서 발생하며 기를 발산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합기도의 정신이다.
( 故 최용술 도주님 말씀 일부 )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지은 世俗五戒(세속오계)인 
事君以忠(사군이충), 事親以孝(사친이효), 交友以信(교우이신), 臨戰無退(임전무퇴) 
殺生有擇(살생유택) 으로 화랑들이 지키는 誡命(계명)이다.

三鋼五倫(삼강오륜)
君爲臣綱(군위신강), 父爲子綱(부위자강), 夫爲婦綱(부위부강), 君臣有義(군신유의), 
父子有親(부자유친), 夫婦有別(부부유별), 朋友有信(붕우유신), 長幼有序(장유유서) 이며, 
도덕(道德)의 기본이 되는 세가지 도리(道理)이니 유교(儒敎)에서 이르는 다섯가지의 인륜(人倫)을 오늘날까지 인간의 도리(道理)로써 전해내려오고 있다.


최용술도주님 가계도


가계도



최용술도주님 일대기


유년시절과 일본 정착


최용술도주님사진 故 최용술 도주님은 죽산 최씨로 경북 선산군이 선향이며,조부님때에 충청북도 황간으로 이주하였다.1904년 7월 20(주민등록상) 충북 영동군 매곡면 광평리(현재 행정구역은 황간면 임)461번지에서 부 최사연과 모 이정학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최도주님은 어린시절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으나 세상을 알기 전인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하여 고아가 되었다.
이때부터 이 소년은 따뜻한 손길을 펴주는 이 없는 불우한 어린 소년이 되었다.졸지에 고아가 된 이 소년은 마땅한 갈곳이 없어 양친 생전 시에 친히 지내던 일본인 제과업자 야마다씨 부부 집에 자주 놀러가게 되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야마다시부부는 이 소년을 따뜻한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다.
야마다시부부는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수려하고 행동이 용맹스러우며 지혜가 뛰어난 이 소년에게 차차 정이 들어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다.
1908년경 야마다씨 부부가 한국에서 제과업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자 이 소년도 함께 가게 되었다. 야마다씨가 일본 쿠쥬 야와타시에 머무는 동안 이 소년은 망향의 생각에 견디지 못하여 고국으로 되돌아가기를 소청했으나 이 부부는 소년을 달래어 무사인 야마모토히데오라는 주지에게 맡기고 야마다씨부부는 그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이 소년은 부모같이 의지하고 따르던 사람마저 이별하고 낯설은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곳 산천과도 정이 들고 야마모토히데오와도 친근하게 되자 야마모토히데오씨는 이 소년을 양자로 삼았다.
이때부터 이 소년은 야마모토히데오씨로부터 종교의 의식과 무사의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스승 다께다쇼가꾸선생과의 만남


야마모토히데오씨의 양자로 들어간 후 4년째가 되던 해(당시 나이 14세경) 어느날 야마모토히데오씨 집에 친구인 다께다쇼가꾸 선생이 내방하였다. 그 당시 다께다쇼가꾸 선생은 일본전역을 순업하는 중이었는데 야마모토히데오씨는 친구인 다께다쇼가꾸 선생에게 이 소년을 문화생으로 입문시키기를 소원한다. 그때부터 이 소년은 다께다쇼가꾸의 문화생이 되었다. 다께다쇼가꾸 선생이 야마모토히데오씨와 얼마동안 지나다가 5인의 문도를 데리고 일본 니가타현에 있는 신슈시 신슈산에 입산할 때 이 소년을 데리고 갔었다. 여기서부터 최도주님은 합기술 수도에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스승과의 합기술 수업


최도주님은 신슈산에 입산 한 후 8년간의 수도생활을 하시다가 대정 8년인 1919년 약 20세때 다께다쇼가꾸선생과 하산하여 동경 니혼바시에서 약 6년간 거주하면서 스승인 다께다쇼가꾸 선생과 함께 황실에서 대신들을 교수하셨다.그후 다께다쇼가꾸 선생을 따라 순업의 길을 떠나 일본전국을 순회하다가 북해도 키타미자와시에서 5년간을 지내면서 선생과 합기술을 연마,교수하던중 다께다쇼가꾸선생이 고령으로 순업을 계속하기가 어렵게 되자 일행은 오타루시로 되돌아옴으로써 순업의 긴 여정을 마쳤다.그 후 최도주님은 스승인 다께다쇼가꾸 선생을 오타루시에서 와타나데긴다노씨가 경영하는 여관에 모시고 친부처럼 봉양하였으며,1943년 스승이 고령과 신병으로 타계할 때까지 스승의 수업을 이어받아 일본 합기술 발전에 큰 역할을 하셨다. 최도주님은 수십여년간 그의 제자로 있으면서 합기술에 관한 3800여 가지의 술기를 전수 받아 명실공히 합기술의 2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이 해방되자 최도주님은 "이것은 본시 조선의 무술이었으니 나는 너에게 되돌려줄 뿐이다"라고 한 스승의 말씀을 되새기며서 우리 민족의 전통무예인 합기도를 다시 한국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귀향을 결심하게 되었다.



귀국 후 활동


귀국후 대구에서 정착한 도주님은 당시 양조장을 경영하던 서복섭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양조장 건물에서 한국 최초의 대한합기도유권술 도장을 설립하고 합기도 보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 3월에 합기술 유지자들과 함께 대구에 총본부를 둔 대한합기술무도회를 창설하고 본격적으로 합기술을 전파하셨다.그 후 전국에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시면서 주야로 합기술 발전에 노력하시다가 1986년 10월 27일 향연 87세로 세상을 타계하셨다.
도주님은 생전에 "모든 동양무술은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합기도 역시 신라인에 의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무술이 되었다. 그러나 검도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그 형이 이룩된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듯이 이제 우리 모든 합기도인에게는 고 최용술도주님의 합기도정신과 술기를 이어받아 최용술 합기도를 새로운 합기도,세계적인 무예로 발전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주)상기내용은 김정윤 선생의 저서인 "합기술(1962년 발행)" 에 기술된 최용술도주님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Designed & System by 제로웹  ㆍTotal 28,138